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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슬(priest)

금슬 29장

제29장 함께 베개를 베다

그날 이후, 시무단은 더 이상 ‘고길 먹거리 도해’ 종이를 들고 백리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고길성의 군비는 겉보기에는 느슨하지만 내부는 엄격했다. 고회양의 야심은 마치 땅속 두더지가 흙을 살짝 밀어 올려 지면 위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래 고(古)길왕이 성주에게서 빼앗은 땅은 아직 재측량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주인이 바뀌어 성이 고(顾)씨로 바뀌었다. 고회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성 안의 대지주와 상인들을 모두 불러 모아 철갑을 두른 장군들 사이에서 함께 술 마시고 음식을 먹게 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반역자 몇 명을 처형했다. 그중에는 주인을 한칼에 죽인 왕이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회양은 중용이야말로 대도(大道)라고 보았고, 무릇 모든 일은 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다. 독해야 사내답고, 사람은 굽힐 줄도 알아야 하며, 때로는 뻔뻔해야 한다지만, 왕이구처럼 하늘이 울고 땅이 통곡할 만큼 뻔뻔한 자는 지나치다고 여겼다.

왕이구는 “나는 공신이다!”라며 소리치다가 결국 군중 앞에서 두 동강 났다.

이들 부유한 자들은 늘 비단과 술집에 드나들며 글자를 알든 말든모두 “군자는 도살장과 멀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자들이라 닭 잡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이 장면을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현장에서 기절한 이가 둘, 토한 이가 셋, 손발이 차가워지고 눈이 멍해져 떨기 시작한 이도 있었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연회 자리에서 시무단은 직접 일어나 술을 권하며 이렇게 안심시켰다.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우리 형님께서 왕야의 명을 받아 반란을 평정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제 반역자는 죽었고, 앞으로는 모두가 평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오, 이분은 장 원외 아니십니까? 손이 왜 이렇게 떨리시나요? 누구 없느냐, 장 원외께 술을 다시 따라 드려라.”

조금 전까지 칼에 피를 묻히던 건장한 사내가 묵묵히 다가와 술을 따랐다. 피 냄새가 섞인 술을 받아든 장 원외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그는 대신 눈을 뒤집었다.

고회양은 비통한 표정으로 한숨 쉬며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와서 여러분을 놀라게 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벌로 술 한 잔을 마시겠습니다.”

 

시무단도 함께 술을 마시며 이어 말했다.
“다들 너무 심각해지지 마십시오. 이는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 형제가 고길에 장기 주둔할 예정이니 여러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군과 민은 본디 한 몸입니다. 우리 형님이 지키고 있으니, 앞으로는 반역자 따윈 절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육운주가 탁자를 쾅 내리치며 칼을 냉큼 올려놨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부자들은 간이 철렁했다. 육운주는 차갑게 말했다.
“다시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죽인다!”

칼날 앞에 고기나 다름없는 부자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시무단은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삼형의 이 칼이 있으니, 이제 누가 감히 눈치 없게 반역을 하겠습니까?”
그는 “반역”와 “눈치 없게”이란 말을 강조했다. 고길 최대의 차상인 송 노인은 바로 눈치를 챘다. “눈치 있게” 자신은 단지 성실한 상인일 뿐이며, 반역자와는 일절 관계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백성의 안녕을 위해 사재를 털어 홍건군의 군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장 원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눈치껏 따랐다——말이 없는 장 원외는 너무 감격해서 말을 못 하는 거라 여기기로 했다.

이리하여 고회양은 ‘고 대동가’로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즉시 사람들을 시켜 증서를 들고 돌며 서명과 도장을 받게 했고, 나중에 혹시 말 바꿀까봐 각자 집에서 사람을 불러 데리러 오라 했다. 그리고 계약서나 부동산 증서 같은 소중한 문서는 고 장군이 직접 보관하겠다고 밝혔다. 도둑이 훔쳐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며.

저당 하나 맡기고 사람 하나 데려간다는 식——“강탈”이란 말로도 부족한 강철 같은 수완이었다.

돈, 식량, 병력, 세력권까지 모두 하나하나 쌓아야 했다.
시무단은 안경에서 온 사람들을 전담하게 되었고, 그들은 고길에 오자마자 매우 공손하게 환영받았다. 매일 술과 노래, 맛있는 음식과 춤, 심지어 온유향(温柔乡)의 사장에게 직접 교육받은 미녀들이 시중을 들며 신선처럼 지냈다.

그 누구도 그들을 감금하지 않았고, 전쟁 준비를 위해 데려온 군사들도 어느새 자기가 호강하러 온 줄 착각했다. 며칠이 지나자 고길에는 겨울이 시작되고 눈이 내렸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고, 문을 나서면 매서운 산바람이 들이쳤다. 이럴 땐 실내에서 곡을 들으며 따뜻한 화로에 술을 데우고 있자니, 더 움직이기 싫어졌다.

노골적인 공격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화려한 유혹’이라는 암살 방식이다.

시무단이 밖에서 응대하는 시간만큼이나 백리는 방 안에 박혀 있었다.
처음에 이사낭은 시무단이 그를 소홀히 한다며 걱정하여 몇 번 찾아와 함께 이야기하자 권했으나 백리는 모두 거절했다. 시무단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백리는 마치 차가운 돌이 된 듯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이사낭은 퇴짜를 맞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백리의 모습을 보고선, 분명 세속을 벗어난 고인(高人)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은 보통 일반인과 다른 괴팍한 취미를 가진다고 여겼다.

백리는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찻잔의 물을 동경(銅鏡:구리 거울)에 부었다. 거울 위에 얇은 막이 떠오르고, 미세한 물결이 일자, 그 위에 시무단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백리는 마치 못에 박힌 듯, 오랫동안 그 물결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시무단이 사람들 속을 오가는 모습, 그의 눈빛 하나하나, 의미가 담긴 미소 하나하나,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보며, 마치 그 수년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했다.

시무단은 밤늦게야 방으로 돌아왔다.
겨울이 되자 바람과 눈이 내리고, 바깥에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와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은 따뜻했지만, 찬바람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시무단은 온유향에서 나오는 길에 안경왕이 보낸 사람들 중 실력 있는 자 몇이 진짜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 중 몇 명은 몰래 빠져나가 왕에게 보고하러 떠났고, 고회양은 그들을 완전히 붙잡지 않고 일부러 길에서 살짝 가로막기만 했다. 결국 그들을 놓아준 것이었다. 곧 추호는 스스로 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시무단은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다가 추위를 타 약간 감기 기운이 돌았다. 밤에는 오래된 기침이 도졌고, 뒤척이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작은 촛대를 든 누군가가 들어왔다.
바깥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 든 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백리는 발로 문을 닫고, 찬바람에 몸을 이불에 웅크리고 있는 시무단을 보고 말했다.
“기침 소리가 들려서.”

그는 말을 하며 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는데, 그 초는 서서히 한 자 크기의 상자가 되어 침대 옆에 자리 잡았다.
시무단은 손을 내밀어 그 불꽃을 찔러보았다. 불꽃은 움직이지 않았고, 손가락이 그 속을 통과했지만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근 것 같았다.

“이게 뭐야?”

“작은 요술이야.”
백리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아냐, 어릴 때 유풍로 몰래 마셨다가 생긴 병이야. 괜찮아.”
시무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때는 겨울이면 밖에 안 나갔는데, 지금은 강호를 떠도니 안 나갈 수가 없지.”

‘강호에 떠돌지 않아도 돼.’
백리는 속으로 생각하며 의자를 가져와 그의 침대 옆에 앉았다.
손으로 불꽃을 쓰다듬자, 불빛은 어두운 색으로 바뀌었고, 눈부시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따뜻했다.
백리는 말했다.
“자. 내가 여기 있는 한, 이 불은 꺼지지 않아.”

시무단은 잠시 멍하니 그를 보다가 물었다.
“여기 앉아 뭐 하려고?”

백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계속 기침해서 신경 쓰여. 네가 잠드는 걸 보고 잘게.”

시무단은 말했다.
“한밤중에 눈 떠서 옆에 가부좌 튼 문신(门神) 하나 앉아 있으면, 기절할지도 몰라.”

백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무단은 한숨을 쉬며, 이 녀석이 클수록 점점 더 상대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느끼며 안쪽으로 조금 움직여 이불을 들추고 말했다.
"올라와."

백리는 그를 한 번 바라보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시무단이 다시 말했다.
"빨리, 따뜻한 기운 다 빠지겠어."

그제야 백리는 마치 팔다리가 녹슨 것처럼 천천히 기어올라와, 시체처럼 침대 끝에 딱 붙어서 딱딱하게 누웠다.
잠시 후, 그는 시무단이 간간이 하던 기침이 조금씩 잦아들고, 더 이상 몸을 뒤척이지 않는 걸 느꼈다. 마치 잠들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 그런 말을 했는데도, 넌 날 올라오게 했어. 무섭지 않아?"

시무단은 머리를 파묻고, 흐릿하게 말했다.
"내가 너까지 무서워하면, 그건 토끼가 되는 거 아냐?"

백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 눈은 어둠 속에서도 매우 빛났다. 그는 물었다.
"그럼 너 화는 안 나?"

시무단은 그가 말을 걸어 깨어난 듯 눈을 뜨고 그를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다 화냈어."

백리는 멍해졌다. 그는 예전에 시무단이 자기를 업고 동굴에서 힘겹게 밖으로 나올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내가 너 속인 거 화 안 나?"라고 물었는데, 시무단은 이번처럼 아무렇지 않게, 마음 없이 "지금은 바빠, 우리가 도망치고 내 사부님을 찾으면 그때 화낼게"라고 대답했었다.

백리는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손을 시무단의 허리에 얹으며 그를 천천히 끌어안으려 했지만, 시무단은 그의 손을 쳐냈다.
"움직이지 마."

백리는 스스로 그의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 그의 숨결이 자기 목덜미에 닿는 것을 느꼈고, 알 수 없는 간지러움이 일었으며, 마음은 가벼워지고, 뛰고 또 요동쳤다.

"무단……" 그가 말했다. 마치 말을 멈추려는 듯 했고, 한참을 지나 다시 이어 말했다.
"오늘 온유향에서 어떤 여자의 손이 잘려서 문기둥에 걸려 있었어. 너 그 일 몰래 덮었지? 사람 시켜 몰래 조사하게 했고, 그렇지?"

시무단은 갑자기 눈을 떴다.

백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바로 그날 네가 날 온유향에 억지로 끌고 갔을 때, 네 옷을 붙잡은 그 여자였어."
"너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봤어." 백리가 말했다. "넌 내가 그랬을까 봐 무섭지 않았어? 난 다른 사람이 널 보는 게 싫어. 그 사람들의 눈을 다 파내고 싶어. 누가 널 건드리는 것도 싫어. 널 안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난 그녀의 손이랑 눈을 다 잘라버리고 싶었어. 그런데 넌 내가 했을 거라고 의심 안 해?"

시무단은 잠시 멈추더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나한테 그거 네가 한 짓이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한 게 아니야." 한참을 지나서야 백리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헛소리는 왜 해?" 시무단이 의아하게 물었다.

"넌 내가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안 해?" 백리의 말투가 갑자기 조금 급해졌다. 그는 물었다.
"예전에 골짜기에서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기기만 해도, 백자이가 다……"

시무단은 더 이상한 말투로 그를 끊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네 계모처럼 보여?"

백리는 말문이 막혔다.

시무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백리가 원래부터 마물에 얽혀 있어서 마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고, 또 아무 할 일도 없이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알을 품듯 있으니, 틀림없이 하는 일 없이 헛생각만 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잠시 멈추고 그는 다시 덧붙였다.
"너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거, 많은 게 네 본의가 아니라는 거 알아…… 그리고 네 몸에 있는 그 마물들, 어떻게 엮였든 간에, 그런 것들을 억누르고 있으니 많이 힘들겠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걱정하지 마."

백리는 이 말을 듣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천천히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 자기 턱이 시무단의 머리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시무단의 숨결이 고르고, 이미 잠든 것처럼 보이자, 백리는 조심스럽게 그를 살짝 안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어떻게 내가 본의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거야?

너는 어떻게 내가 그 여자의 손을 진짜로 자르고 싶지 않았다는 걸 아는 거야?
너는 분명히 의심하고 있으면서, 왜 여전히 나를 좋게 보려고 하는 거야?
넌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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