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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슬(priest)

금슬 28장

제28장 그림자

시무단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백리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시무단은 ‘온유향(溫柔鄉)’이라는 간판 아래서 잠시 깊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 데리고 놀러온 김에, 큰형 부탁도 좀 들어주고…… 그리고 말이야, 여기 안주가 기가 막히다는 소문 들었거든. 맛있으면 좀 포장해가자. 내일 아침밥으로 먹게.”

백리는 한숨이 가슴에 걸린 듯 말문이 막혀 입술이 새하얘질 정도로 화가 났지만, 시무단은 눈치 따위는 없는 듯, 혹은 일부러 못 본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유향’이란 이름은 노골적이지만, 장사 수완은 나쁘지 않았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여자들이 흘끗 눈길을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손님의 등급을 대충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같은 업계는 원수라고, 맞은편의 아가씨들 몇이 시무단과 백리를 보고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자, 이쪽 아가씨들도 질세라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잽싸게 달려들어 잡아끌었다. 손님을 빼앗길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시무단이 갑자기 백리를 놓고는 몸을 돌려 크고 시원하게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마침 그의 소매를 붙잡고 있던, 어쩔 줄 몰라 하던 아가씨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금세 민망함을 달콤한 미소로 바꾸며 한걸음 다가왔지만,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풍기자마자 시무단은 재채기를 멈추지 못하고 두 걸음 물러나더니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의 얼굴은 금세 풀빛이 되었다.

시무단은 여자를 많이 접해봤지만, 그들 대부분은 창운곡의 요괴들이거나, 말수 적은 사매들이거나, 군대의 남자 같은 여자들이었다. 이런 이들은 화장품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네 번째 누이는 특히 털털해서, 웬만해서는 머리에 기름도 바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미인을 보면 눈물 콧물부터 나는 체질인 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백리는 시무단의 손을 스친 그 여자의 손을 싸늘한 눈빛으로 훑고는, 시무단의 처참한 꼴을 쓱 훑어보며 속으로 차갑게 생각했다.
‘나를 약 올리더니, 꼴 좋다!’

하지만 시무단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그런 복잡한 심정을 읽어내지 못했고, 백리를 살짝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아까와는 달리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 아가씨에게 말했다.
“저쪽에 있는 친구 말이야. 좀 수줍음이 많아서. 깔끔한 애들 몇 데리고 가서 잠깐만 같이 있어 줘.”

그러고는 품에서 비취 옥반지를 꺼내 그녀 엄지손가락에 끼워주고는, 숨을 꾹 참고 그녀의 뺨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2층에 먼저 올라갈게. 너희 주인 좀 불러와. 거래할 게 있어.”

말을 마치고는 시무단이 백리를 힐끔 쳐다보며 눈짓을 하더니, 숨을 들이마시고는 물에 뛰어들 듯이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백리는 어느새 수많은 여인들 틈에 홀로 남겨졌다.

시무단은 2층에 오래 머물렀고,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고지성 전체에 밤의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야금 소리, 춤소리는 거의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짧은 선율만이 간간히 흘러나왔다.
온유향을 오가던 손님들도 거의 빠져나갔고, 예민한 귀를 가진 이들만이 칸막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애매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시무단은 혼자 계단에 서 있었다. 주변의 짙은 화장품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고,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겨울 초입의 밤공기는 쌀쌀했고, 그는 낮게 기침을 했다.
그 순간, 그는 문득 고지라는 이 땅이, 참으로 싸구려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이곳은 산을 끼고 있었지만 가난하진 않았다. 차와 뽕나무 산업이 번성했고, 지역은 작지만, 하녕이라는 황량한 변경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고을이었다.
고지엔 부자들이 많았고, 즐길 거리도 많았다. 하지만 이 전쟁과 혼란의 시대에, 사농공상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는 와중에도, 창기 업계만큼은 오히려 더 활기를 띠는 기세였다.

시무단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일 천지가 무너지고,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아무도 없다면…… 오늘 밤 이 온유향은 아마 폭발하겠지?
세상에 명예도, 이익도 없다면…… 결국 남는 건 쾌락뿐인 걸까?’

그는 어린 하녀 하나를 불렀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손님을 맞지 못하는 듯했으며, 손님들이 떠난 뒤 어지럽혀진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밤 온 하얀 옷 입고, 밀가루 반죽같이 생긴 그 공자 봤니?” 시무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녀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나갔어?”
하녀는 공손히 말했다.
“아직 안 나가셨어요. 그 공자님, 지금 별실 에서 곡 듣고 계세요.”

“데려다 줘.”

백리는 성질을 부리며 뛰쳐나간 것도 아니고, 이 온유향의 환락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어떤 여인과 방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하녀가 시무단을 데리고 그 방에 도착했을 때, 백리는 문을 등지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약간은 멍한 표정이었다.

탁자 위 술은 이미 식었고, 난로 속엔 불빛도 희미했다. 건너편엔 연노랑 치마를 입은 가인이 비파를 안고 조심스레 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흉악한 괴물을 상대하듯 조심조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무단이 들어오자 그녀는 시선을 재빨리 그에게로 옮기며, 도와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시무단은 백리 곁에 앉았다. 가인은 “초승달이 강 위에 떠 있고, 신선의 궁전은 우뚝하네. 걸어가고 또 걸어가네, 일곱 살에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시무단은 그녀의 구슬프고 질질 끄는 노래를 들으며 하품을 하더니, 과일 쟁반을 들고 “와작” 깨물었다. 씹으며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역시 겨울이네. 다 저장해놓은 거라 신선하지가 않아.”

그가 다람쥐처럼 과일을 먹는 소리에, 슬프게 노래하던 여인이 결국 노래를 멈췄다. 그녀는 시무단에게 주의가 향하는 틈을 타 비파 줄을 눌러 멈추고는 조용히 일어서서 옆에 가만히 섰다.
이 대공자는 이상했다. 한 곡을 내내 부르게 해서 목이 다 쉬어가는데도 멈추질 않더니, 지금은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백리는 깊은 눈빛으로 시무단을 바라보았고, 시무단은 여전히 과일 접시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백리가 물었다.
“좋았어?”

그 노래 여인은 그 말에 숨을 죽였다. ‘이 공자가 좋다고 하면 또 불러야 하나’ 하고 말이다.

“별로.” 시무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질척거려서 뭘 부르는지도 모르겠더라고.”
그녀가 또 노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얼굴빛은 더 창백해졌다.

백리는 낮게 말했다.
“하늘은 멀고, 은하수는 맑고, 별은 이슬보다 오래가지만, 결국은 사라지고 또 사라지지. 결국 오래 남는 건 이별뿐인 것 같아. 삼성과 상성이란 별은 절대 마주치지 못한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서로를 못 본다니, 이보다 더 쓸쓸한 일이 있을까?”

시무단은 백리를 멍하니 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이 뭐가 그리 보고 싶을까?”

백리는 그의 손을 확 움켜잡았다. 시무단은 얼굴을 찡그리며 뿌리치려 했지만, 백리의 손은 쇠고리처럼 그의 손목을 꽉 조였고, 시무단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리자, 좀 놔봐. 나 씨 뱉기 불편하잖아.”

백리는 힘껏 당겨 그를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밤새 괴롭힘을 당한 가인은 깜짝 놀라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놀라움에 휩싸였다.

시무단은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거두고 낮게 물었다.
“백리, 너 뭐 하려는 거야?”

백리는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관자놀이를 따라 시무단의 어깨에 흘러내렸고, 두 사람의 숨결은 뒤섞였다.
그러나 눈빛은 또렷이 분명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백리는 오랜 침묵 끝에 물었다.
“왜…… 왜 우리는 예전처럼 못 지낼까?”

시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마치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시무단 얼굴에 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무단은 가볍게 웃더니, 백리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백리는 몸을 굳혔다.
시무단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냉랭한 눈으로 그의 검은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엔 평범한 사람의 형상이었지만, 시무단의 시선이 닿자마자 그림자 속에서 이상한 것들이 꿈틀대며 솟구쳐 올랐다.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고는 이내 숨어들었다. 마치 백리의 그림자는 인간의 형태가 아니라, 짙은 먹물이 땅 위에서 꿈틀대는 것 같았다.

시무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게 뭐야?”

백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무단은 말을 이었다.
“마물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다는 기록이 옛날에도 있었지. 설마 진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이곳은 음습한 기운이 넘치니 그림자 속 마물도 억눌리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건가?”

“백리!” 시무단은 탁자를 세게 내리치고는 그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며 소리쳤다.
“감히 그림자에 마물을 기르다니, 만마가 되돌아와 널 해치면 어쩌려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늘 여기 안 왔으면…… 나도 몰랐겠지……”

하지만 백리는 묵묵히 웃을 뿐이었다.
시무단은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이내 깊은 찡그림과 함께 손을 놓았다.

“내가 방법을 찾아서, 저것들을 네 몸에서 없애 줄게.”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가 괴물처럼 고개를 들더니 온 방 안을 뒤덮고 등불까지 삼켜버리며 시무단에게 달려들었다.

백리는 일어나 검은 안개를 일으켜 시무단을 감쌌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방 안의 가구, 창틀까지 전부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창밖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찢어질 듯한 울음을 터뜨리며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람을 뼛속까지 오싹하게 만드는, 하늘을 가릴 듯한 엄청난 살기가 감돌았다.

백리는 낮게 말했다.
“누구든 그를 다치게 하면, 난 너희 혼과 육체 모두 사라지게 만들 거야. 해보시지 그래.”

그 말에 그림자 속의 마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천천히 물러나며 그림자 안으로 숨어들었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시무단은 백리를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시무단은 웃을 때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 같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송곳니와 보조개를 보이며 웃곤 했다.
그는 계산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웃지 않는 얼굴은 이미 ‘남자’의 얼굴이 되었고, 눈빛에는 한 점 빛도 없었다.
마치 깊고 깊은 우물처럼.

잠시 후, 시무단은 한숨을 내쉬며 방을 먼저 나섰다. 낮게 말했다.
“밤이 깊었어. 돌아가자.”

백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서 있다가, 시무단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줄게.……다만, 내 마음을 알아줘.”

시무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걸어 나갔다.그는 이 마장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난 이 흐트러진 별자리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고, 이 산송장 같은  대건강산이 산산조각 나길 바란다.
그걸 네가 줄 수 있겠어?’

 

리자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시무단은 마치 변명하듯 되뇌었다.
‘분명 그림자 속 귀신들 짓일 거야. 어떻게든 저것들부터 없애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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