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검은 머리카락
시무단은 백리와 방 안에 오래도록 함께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옛정을 나누며 한담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백리가 그간의 삶을 몇 번 묻기도 했지만,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백리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른거리자 그제야 방에서 나와 객실로 향했다. 시무단은 그를 문밖까지 배웅하고, 그가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다시 문을 닫고 원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백리가 앉았던 의자 위에는 떨어진 머리카락 한 가닥이 있었다.
시무단은 그 머리카락을 주워 손가락에 두 번 감았다. 그의 시선은 금슬과 함께 걸려 있는 성반 위에 멈췄다 —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시무단은 자신이 의심이 심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돌아온 백리는 기억 속의 그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마물의 혈통, 부친 살해……
마물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무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요괴와는 다르다 — 요괴에게는 요도의 이치가 있으며, 대부분의 세속 요괴들은 수련을 통해 인간 형상을 이루고, 인간처럼 세상에서 살아간다. 다만 종족이 다를 뿐이다. 시무단은 어려서 도문에 입문했고, 인간보다도 더 많은 요괴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마물은 두려운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것들이다. 백리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나타났을 때, 시무단은 무의식적으로 그 두 글자를 내뱉었다. 사실 그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다급한 순간에 떠오른 유일한 답이었을 뿐이다.
백리를 따르는 그 검은 그림자는 대체 무엇인가?
백리의 말에 따르면, 예전 땅이 갈라졌던 큰 틈과 산등불의 억압 아래에서도 봉인의 마물은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떻게 나왔는가?
그리고 왜 나온 것인가?
그는 백리다 — 시무단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한 손에는 백리가 무심코 떨어뜨린 머리카락을 감고, 다른 손가락은 조용히 찻잔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백리는 좋은 형제다. 어릴 때 함께 장난치며 자랐고, 함께 목숨을 건 일도 겪었다.
시무단은 몇 번이고 손을 성반 쪽으로 뻗었다. 그러나 손끝은 공중에서 자꾸 멈췄고, 머뭇거리다 결국은 다시 거뒀다.
백리의 머리카락이 성반 가까이에 다가가자, 그 위에서는 어스레한 빛을 띠는 별의 실들이 살며시 뻗어 나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듯, 시무단의 손끝을 가볍게 건드리며, 그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살짝 끌어당기기도 했다.
마치 그것도 알고 싶어하는 듯했다.
갑자기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시무단은 놀라듯 움찔하며 마치 무엇을 감추려는 듯 급히 손을 거두고, 백리의 머리카락을 허리에 찬 주머니에 감쌌다.
아무 일 없는 듯 문을 열었고 — 문 앞에 선 사람은 고회양이었다.
“큰형?”
고회양은 그가 아직 외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잠들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방 안에 불이 아직 켜져 있어, 잠깐 몇 마디 하러 왔다.”
시무단은 그를 방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무심결에 백리가 묵는 방 쪽을 흘끗 보았다. 불이 꺼진 것이 보이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고회양에게 차를 따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큰형?”
고회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최호의 편지를 받았어. 보아하니 그 노인은 더 이상 못 기다리겠는지, 며칠 내로 사람을 보낼 생각인 듯하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시무단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 건성으로 말했다.
“붙잡아 두십시오.”
고회양은 찡그리며 말했다.
“삼형과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해. 내가 보건대, 이 고길성은 사실 좋은 땅이야. 지키기는 쉬우면서 공격당하기는 어렵지. 근처의 군현과 마을들도 이미 며칠 내로 사람을 보내어 조사했지. 시간을 들여 아우르면, 세력은 안경에 못지않을 거야. 이미 손에 넣은 것을 왜 놓겠나. 하지만 그 이후는 어찌할 셈이냐? 정말 최호와 등을 질 작정이냐?”
“아직은 등을 질 필요 없습니다.” 시무단이 말했다. “우선 시간을 끌고, 고길 일대의 수비를 우리 사람으로 바꾸십시오. 양식을 비축하고 병사를 모으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형님은 걱정 마시고 본일에 집중하십시오. 최호 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고회양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시무단은 웃기만 했고, 대답하지 않았다. 고회양은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물었다.
“오늘 온 그 사람은……”
“제 친구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그를 잘 압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좋은 사람입니다.”
고회양은 놀라 멈칫하더니 급히 말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다만 나이가 비슷하고, 뜻이 통하는 친구가 드물지 않냐. 자주 어울리는 것도 좋은 일이야. 보니 그 사람, 기상이 남다르더군. 그가 원한다면, 이곳에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아. 나로서도 환영이야.”
시무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그는 아마 머물 수 없을 겁니다.”
방 안의 촛불은 조금 어두웠다.
시무단의 약간 길고 가느다란 눈꼬리에는 몇 가닥의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워, 그의 얼굴선에 은은한 섬세함을 더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마치 완전히 떠지지 않는 듯, 한 줄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고회양은 늘 느꼈다. 시무단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가 마음속에 담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 눈빛은 유독 깊어 보였다.
사람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이는 따뜻한 밥 한 끼에 만족하며 한구석에 안주할 수 있지만, 어떤 이는 태생이 부귀 속에 자라지 않았고, 금과 옥에 익숙하지도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얻음’에서 오는 기쁨을 빠르게 떨쳐내고, 더 넓은 곳을 바라보며, 다음 단계의 쟁취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뼛속 깊은 갈망은, 어떤 이는 영웅이 되게 하고, 어떤 이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고회양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고길성에 들어온 후, 예전 황제 같은 삶이 다시 시작됐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대부분 출신이 낮았고,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게다가 요즘은 백성들이 “군 나리, 군 나리” 하며 떠받들었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주인부터 종업원까지 몹시 공손했다. 심지어 돈을 안 내도 되는 분위기였다.
당장이라도 팔 다리가 여덟 개쯤 자라서 장터를 가로질러 행진하고 싶을 정도였다.
군기 같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원숭이산에다 깃발을 꽂아놨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먹고 마시며 편히 지내는 걸 누가 마다하겠는가? 왜 남 따라다니며 목숨을 허리에 차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고회양은 며칠 지나지 않아 즉시 명령을 내렸다.
고길 수비군은 각자의 계급에 따라 정해진 몫 외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며, 민가를 침범하는 자는 즉시 처형한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고회양은 육운주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군령을 위반한 열 몇 건을 직접 처리하게 했다. 육운주는 말은 순하지 않지만 칼은 아주 빨랐고, 좀처럼 직접 싸움에 나서지 않지만 한 번 칼을 들면 인정사정 없는 인물이었다.
하루 만에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경고하듯 고길성의 대로에 피가 튀었고, 이튿날부터 이 수비병들은 모두 얌전해졌다. 고회양은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고, 채찍을 휘두르되 동시에 어떻게 당근을 줄지까지 꼼꼼하게 계산했다. 그가 병서에 정통해서 그런 것인지, 타고난 소질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길과 이후 여러 마을에 배치된 수비병들은 하나같이 질서정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고회양이 떠나자, 시무단은 등불 아래 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별반을 꺼냈다. 아무런 동작 없이, 그 위에서 별들이 정해진 궤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는 손바닥을 펴 별반 위를 스쳤고, 곧 일곱 개의 점이 빛났다. 자세히 보면 그 가운데 한 점에서 희미하게 붉은 빛이 비쳤다.
시무단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미(紫微)의 위치가 미세하게 치우쳤고, 태음이 요동친다…… 여전히 혼란하군.”
그는 손가락을 비틀자 별반 위의 별들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평소엔 늘 흐릿한 표정을 짓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고, 속으로 말했다.
너희가 천명을 바꾸었다고? 그럼 내가 바꿀 수 없단 말이냐?
이 세상에 정해진 결말 따위는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걸 깨뜨리면 어쨌단 말인가?
백 년, 천 년이 지나도, 반드시 누군가는 반항적인 자세로 나서서, 그 수많은 봉화를 다시 타오르게 할 것이다.
변화 없는 세상이라면, 이 세상은 결국 썩어 문드러진 죽은 물이 될 뿐이다.
곧 시무단은 등을 끄고 자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별반에서 뻗은 별실이 그의 허리에 찬 주머니를 감았고, 시험하듯 백리의 머리카락 한 올을 감았다.
시무단의 눈빛이 번뜩였고, 두 손가락으로 별실을 끊어버리더니, 백리의 머리카락을 등불에 태워버렸다.
그는 손을 휘둘러 등을 끄고, 약간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자신도 점점 마에 빠지는구나. 리자의 사랑이든 뭐든 알아서 하게 두지.
어릴 적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일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쪼잔해지니 말이지.
다음 날 아침, 시무단은 마당에서 쪼그리고 앉아 토끼 먹이 그릇을 두드리며 외쳤다.
“리자 일어났어? 빨리 나와 빨리!”
그는 이 천부적인 토끼를 꼭 돼지처럼 기르겠다는 각오라도 한 듯, 일부러 얼굴만 한 큰 그릇을 준비해, 그 안에 채소 잎, 부스러기 과자 등을 가득 담았다.
그 토끼는 주는 대로 다 먹었고, 먹을수록 더 신나 보였다. 시무단이 옆에서 그릇을 ‘댕댕’ 두드려도 식욕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당을 오가던 하인이 이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육공, 오늘 아침은 어디서 드실 겁니까?”
“서두르지 마, 좀 있다 나갈 거야.” 시무단이 말하고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며 말했다.
“저택 창고에서 물건 좀 꺼내 와. 누가 물으면 내가 쓸 거라고 전해.”
“예.”
삼 년을 청렴한 부지사로 지내면, 십만 냥의 은을 모은다 했던가.
하물며 이 고길성주는 생전에 그렇게 청렴하진 않았고, 가문도 체면을 중시하여, 얼마나 많은 재산을 쌓아뒀는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고회양 일행이 모두 가져가게 되었으니, 역시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법이다.
하인이 떠나는 걸 본 시무단은 다시 토끼 그릇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마치 중이 목어를 두드리듯 느릿느릿했다.
잠시 후, 백리의 방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백리는 기분이 아주 좋은 듯 보였고, 그를 보며 웃으며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아침부터 뭘 그리 소란이야?”
시무단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이 놀러 가자?”
마치 다시 봄바람 불던 동굴 앞 시절로 돌아간 듯,작은 송곳니 두 개에, 바지자락을 높이 걷은 소년이 웃던 모습 같았다.
백리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잠시 멍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무단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시무단은 바로 일어나지 않고, “읏” 하고 소리를 낸 뒤 천천히 몸을 비틀어가며 네 발로 일어나더니 투덜거렸다.
“다리 저렸어.”
시무단은 토끼 그릇을 두드려 백리를 불러내고선, 정작 자신은 천천히 움직였고,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작은 마당에서 대문까지 가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고양이를 부르고 개를 놀리며 온갖 짓을 다 했고, 백리는 그를 재촉할 생각도 없었다.
대문 앞에 도착하자, 누군가 시무단이 청구한 물건들을 가져다주었다.
시무단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아, 이제 돈도 생겼고, 오늘은 내가 밥 살게.”
그는 고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동서남북 방향도 아직 제대로 구분 못 했지만, 어느 집의 아침차가 맛있고, 어느 집의 국수국물이 향긋한지 줄줄이 꿰고 있었으며, 골목 어귀의 작은 노점에서 파는 과자까지 전부 먹어봤다.
백리는 그런 시무단의 장악력을 보며, ‘널 굶겨 죽이겠다’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 유능한 먹보였다.
하루 종일 이리저리 놀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시무단은 눈짓을 하며 백리에게 말했다.
“좋은 데 데려가 줄게.”
백리는 그의 표정이 너무 음흉해 보여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곧 시무단이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 펼쳤는데, 간단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시무단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고길은 골목이 너무 많아서 길을 좀 찾아야겠어.”
백리가 고개를 들여다보니,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만 표시되어 있었고, 방향은 따로 없었다.
그 대신 옆에 여러 표지판이 적혀 있었다.
‘홍소사자두(紅燒獅子頭, 고기완자)’, ‘행화촌(杏花村)’, ‘오향란(五香蛋)’ 등등.
이걸 본 백리는 깨달았다.
이 고길성 전체가, 시무단 눈에는 아마도 하나의 거대한 식당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무단은 백리를 데리고 이리저리 다녔고, 걷다 보니 뭔가 이상한 낌새가 들기 시작했다.
요염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붉은 등롱이 이미 걸려 있었으며, 은은하게 빛을 내며 몹시도 은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시무단이 백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도착했다!”
백리가 고개를 들자마자, 거의 분노가 폭발할 뻔했다.
시무단이라는 개 같은 놈을 당장이라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간판 위에는 노골적인 글자 세 개가 적혀 있었다.
‘온유향(溫柔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