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옛사람(故人)
최왕야는 이를 갈며 말했다.
“곡식 열 석 더 내주지, 고 장군 생각은……”
하지만 시무단은 그 말은 아예 안 들은 듯, 고회양을 향해 말했다.
“형님, 옛날 흉년 들었을 때 불렀던 노래, 뭐였죠? 왕야께 심심풀이 삼아 한 곡 불러드릴게요. 뭐였더라… ‘여우는 집에 들지 않고, 들판은 대기근이 들고……’”
최왕야는 분노에 탁, 상을 쳤고, 접시 안의 소스가 사방으로 튀었다.
고회양은 곧바로 시무단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꾸짖었다.
“왕야 앞에서 무슨 망언이냐!”
시무단은 멍하게 고회양을, 그리고 최왕야를 번갈아 보더니,
“아… 이 집에 노래하는 사람이 없길래, 술 안주 삼아 한 소절 흥얼거렸을 뿐인데요.”
고회양은 험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처먹어!”
“배불러요……” 시무단은 눈을 깜빡이며 애처롭게 말했다.
고회양은 단호하게 말했다.
“먹기 싫으면 천천히 먹어. 말은 하지 마라!”
최왕야가 막 폭발하려는 찰나, 괴자장이 탁자 밑에서 그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끌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왕야, 곡식 열 석은 좀 부족하오. 스무 석 어떻겠소?”
시무단은 젓가락으로 그릇을 툭툭 찌르며 투덜댔다.
“형님, 진짜 배불러요. 배가 빵빵하니…… 왕야랑 군사님도 억지로 드시지 마세요. 사람이 매일 배부르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고, 반란도 귀찮고, 투항도 귀찮고……”
최왕야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삼십오석. 더는 안 된다. 길도 얼마 안 되고, 짐이 많으면 오히려 불편하니, 고길을 점령하면 먹을 건 넘쳐난다.”
고회양은 얼른 웃으며 말했다.
“왕야의 너그러움은 참으로 후하십니다. 대업을 이루실 분은 작은 물자쯤 아끼지 않으시는군요. 훗날 분명히 사서에 남을 위인이 되실 겁니다!”
이 아부가 마음에 든지, 최왕야의 표정이 풀렸다. 고회양은 자기 사람이라, 이야기할 맛이 났다.
하지만 시무단은 또 느긋하게 한숨을 쉬더니,
“형님, 왕야께서 이렇게 중히 여기시는데, 절대 실망시켜선 안 됩니다.”
오? 이건 정상적인 말인데?
최왕야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시무단은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가 고길을 점령 못하면 어떡하죠? 고길왕은 키가 탑만 하고, 발을 구르면 땅이 흔들리고, 눈은 방울만 하고, 얼굴은 호랑이 같고, 입은 피웅덩이만 하고, 수염은 철사처럼 단단해서 칼도 안 든대요. 어린아이가 울다가도 얼굴 보면 뚝 그친다던데……”
괴자장이 급히 끼어들었다.
“시 영웅,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만 하세요.”
“아, 네.” 시무단은 말끝을 흐리고 잔술을 홀짝였다.
“왕야께서 자랑하시는 투석차 몇 대, 참 기막히게 잘 만들었다 들었습니다. 좀 빌려쓰면 어떨까요? ‘술은 겁쟁이에게 용기를 주고, 무기는 생존을 보장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희 같은 겁쟁이는 도구라도 많아야 체면치레라도 하죠.”
이 투석차는 최호가 애지중지하는 무기로, 시무단의 도 넘은 요구에 분노하여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 이놈……”
고회양은 재빨리 시무단을 끌어당기며 입을 막고, 황급히 말했다.
“왕야, 접대를 감사히 받았고, 제 아우가 못 배워서 죄송합니다. 제가 데리고 가서 훈육하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시무단은 고회양에게 입을 막힌 채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장 군사님! 내 닭다리! 닭다리 잊지 마세요——”
최왕야 저택에서 한바탕 약을 올리고 나온 두 사람은 대로변을 걷다가, 고회양이 시무단 머리를 툭 치며 조용히 말했다.
“계속 그 따위로 가격 흥정하다가, 이 땅 주인 열 받게 만들면 어떡할 거냐?”
시무단은 천천히 길가 노점에서 과자를 사서 품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담 넘으면 되죠.”
고회양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도 먹어? 방금 그렇게 처먹고도? 내가 흉년 겪은 사람이지, 네가 겪은 건 아니잖아. 맨날 귀신처럼 먹어대니… 사숙한테 진찰이나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살도 안 찌고 말야.”
“배불러요. 사서 오물오물 씹으려고요.” 시무단은 대답하고는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그 최호가 어떤 놈인진 저도 잘 압니다. 사숙 말로는 ‘곰 같은 마음, 토끼 같은 담력, 눈은 크고 배는 작고, 개가 똥 여덟 번 싸려는 성미’라던데요. 전쟁은 못 하고, 이 혼란한 세상 틈타서 자기 궁궐 세워놓고 왕 노릇 하려는 쥐새끼죠. 우리한테 손 쓰긴커녕, 우리가 고길로 넘어갈까 봐 벌벌 떨고 있는 중이죠.”
고회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 놈 진작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참에 뜯어낼 수 있는 건 다 뜯고, 고길부터 접수하자. 삼 형 불러서 작전 짜야지.”
시무단은 “네” 하고 대답하곤, 딱딱한 과자를 “긁적긁적” 깨물며 생쥐처럼 씹었다.
고회양은 한참 쳐다보다 결국 눈을 흘기며 말했다.
“돌아가면 양치해라. 네 치아는 정말로 수고가 많다. 저런 식이면 쇠막대도 바늘 되겠어.”
시무단은 과자를 입에 문 채로 실눈을 뜨며 웃었다. 입가엔 부스러기가 가득 묻어 있었고, 왼쪽 볼에는 보조개가 파였다. 어찌 봐도 아까 최왕야 앞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던 무뢰한 같지 않았다. 그저 귀엽기만 했다.
그런데 그들이 고길에 도착하자, 전투는 애초에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유명한 “고길왕”이란 자는 사실 동네 건달이었다. 지금 세상이 황제도 못 미치는 곳이니, 날마다 왕이고 장군이고 새로 나오던 판에, 그 역시 손이 근질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한밤중에 성주 집을 들이치고 기습해서, 사람을 죽이고 인장을 빼앗았다.
원래 고길성은 민심이 흩어진 상태라,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고, 고길왕 본인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왕 노릇 재미도 보기 전에, 안경왕 최호가 토벌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길왕은 자신도 반란에 성공했으니 이젠 영웅이라며 사람을 모아 싸움을 준비했다. 그는 성루에 올라 깃발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벅차올랐고, 천하제패의 시작이라 믿었다.
그러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멀리서 안경군의 검은 물결이 밀려오는 걸 본 순간—
이 고길왕은 그저 건달이었기에 글도 제대로 못 읽고, 전쟁은 더더욱 몰랐다. 그런 위세는 처음이었고, 그대로 주저앉아 바지를 적셨다.
그 자의 자랑스러운 심복, 지저분한 뒷골목 출신의 왕이구 왕 장군은 정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채고 마음을 돌려 고길왕의 등 뒤에서 기습하여 그를 단칼에 찔러 죽였다. 그런 다음 앞으로 나아가 똑바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들어 기세 좋게 소리쳤다.
“역적은 이미 죽었고, 말장 왕이구는 왕야의 입성을 맞이합니다!”
그는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단호하고 정확하게 전 주인을 죽여버렸다. 성을 포위한 고회양 일행이든, 성 위에 있던 수비병이든 모두 이런 백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
잠시 뒤, 말을 타고 있던 시무단이 평소에는 장식품으로만 차고 다니던 칼집 속 검으로 맹충용을 쿡 찔렀고, 그제야 맹충용이 정신이 들어 소리쳤다.
“이런 제기랄, 성문을 안 열면 우리가 어디로 들어가란 말이냐?!”
성 위에서 사람을 찌른 자가 소리쳤다.
“예, 예, 말장이 곧 성문 열겠습니다!”
성 위 수비병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왕야”가 칼 한 방에 도륙당한 마당에 뭘 지키겠느냐는 생각에, 자신들이 재빨리 반응하지 못해 일등 공을 놓친 것이 한스러워 일제히 흩어져 다투듯 성문을 열고 도개교를 내려 고회양 일행을 들였다. 고길은 이렇게 한 명의 병사도 희생되지 않고 점령되었다.
고회양 일행은 이렇게 쉽게 승리를 거둔 데 어리둥절해 있었고, 그 옆에서 시무단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낭이 물었다.
“꼬마 원숭이, 너 또 왜 그래?”
시무단은 잠시 망설이다 한숨 쉬며 말했다.
“아깝다, 아까워.”
“뭐가 아까워?” 맹충용은 성격이 급했다.
“왜 똥도 세 단락에 나눠서 싸냐? 할 말 있으면 시원하게 해, 그래야 우리가 오래 살아.”
시무단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말의 보폭을 느긋하게 조절하며 도개교를 건넜고 말했다.
“나 전엔 고길이 공략하기 어려울까 봐, 최왕야에게 투석기를 빌리러 갔어. 근데 안 빌려주는 거야. 그래서 대형을 일부러 곤란하게 하려고 그런 줄 알았지.”
고회양은 헛기침을 하며 정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시무단은 계속 말했다.
“내가 군자의 마음을 소인배처럼 본 거지, 아휴! 출발 전에 이 일을 생각하며, 왕야가 이렇게 시기와 질투가 심하니 속이 상해서 말이야. 그래서 왕야의 창고 열쇠를 맡은 조 형한테 은화 열 냥을 줬어. 조 형은 외지에서 떠돌다 안경에 정착한 사람이거든. 일은 그만두고 싶었는데 여비가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여비를 주고, 떠나기 전에 날씨가 건조하니 창고에 불이나 지르라고 부탁했지.”
맹충용과 이사낭은 시무단을 안색 나쁘게 바라봤다.
고회양은 뒤돌아보며 이를 갈듯 말했다.
“육아, 입 닥치고 따라와.”
시무단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 말에 따라갔다.
다음 날, 고길 근처의 세 개 군현과 여덟 개 마을은 모두 수장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쪽으로 부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줄줄이 항복해왔다.
며칠 뒤, 마침 고길의 매월 초하루와 보름 장날이 되어 대로는 마차와 말이 흐르듯 오가고,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성 안 수비병은 모두 그들 측 사람으로 교체되었고, 시무단은 할 일이 없어 거리로 나가 이곳저곳 구경했다.
갑자기,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노점을 발견했는데, 산속의 생물을 파는 곳이었다. 펼쳐진 작은 철창 안에는 꿩, 다람쥐, 토끼 등이 있었고, 시무단의 시선은 한 마리 토끼에 꽂혔다.
그의 눈이 특별히 좋은 건 아니었다. 그 토끼가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뚱뚱한 머리와 커다란 귀는 정말 하늘이 분노할 정도였고, 강아지만큼 컸다. 옆의 다른 토끼들이 그에 비하면 마치 먹을 걸 못 먹은 새끼 토끼처럼 보였고, 좁은 철창 안에서 몸도 돌릴 수 없으면서도 여유롭게 채소를 아작아작 씹고 있었다. 마치 넉넉한 마음과 살찐 몸이라는 말을 체현이라도 하듯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손가락질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시무단은 그 토끼와, 빠르게 움직이는 세 갈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시 넋이 나갔고, 마음속으로는 무슨 감정인지 몰랐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다가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기 있는 그……”
그런데 뜻밖에도 이때, 누군가가 그보다 먼저 손을 뻗어 토끼가 든 철창을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그는 흰옷을 입은 남자였고, 키가 크고 기품 있는 뒷모습은 주변 장터 사람들과는 뚜렷이 구분되었다. 시무단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가 남자의 뒤에서 가볍게 기침을 하고 물었다.
“이보시게, 형님도 그 토끼를 사려는 겁니까?”
흰옷의 남자는 고개를 돌려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고, 시무단과 눈이 마주치자 시무단의 남은 말은 전부 목구멍에 걸렸고,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금슬(pri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