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활진(活阵)
시무단은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강화산인의 작은 정원에 눌러앉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제법 세상 물정에 잘 적응했다. 어차피 강화는 잘 먹이고 잘 재워주었고, 지하 석실 안의 책도 마음껏 볼 수 있었으며,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강화에게 물어가며 지도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강화산인의 성격이 무척 좋아서, 그가 아무리 장난치고 버릇없는 질문을 해도 온화하게 대답해주었고, 단 한 번도 꾸짖거나 때리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시무단은 두 달 넘게 눌러 살았고, 심지어는 조금 심심하고 몸이 근질근질해지기까지 했으니,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두 달이 지나자, 마침내 그는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주원진이 둘러쳐져 있었고, 강화산인은 비록 흥이 나면 삼산육수(三山六水)를 마음대로 돌아다녔지만,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무척이나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작은 정원 주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진법이 둘러져 있어, 강화가 기른 약간의 영물(靈物)들 외에는, 산속의 야생 동물들조차도 그 위세를 아는지 감히 이 근처로 접근하지 않았다.
강화산인이 있을 때는 그나마 그가 별의별 기이한 이야기들을 해주어 제법 재미가 있었지만, 그는 산중에 머물 때마다 삼오일에 한 번꼴로 폐관 수련을 들어가곤 해서, 한 번 들어가면 며칠씩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 시무단을 돌보는 일은 오직 학동(鹤童)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이 학동이란 인물은 지루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딱딱하고 규칙적이며, 하루 종일 웃는 낯 한번 보지 못하고, 흰 찐빵 같은 얼굴로 “도형, 이제 공부하실 시간입니다”, “도형,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도형, 일어나실 시간입니다”라며 반복했고, 혹은 “도형, 만물에는 영이 있으니 어린 생명은 괴롭히지 마십시오”, “도형은 아직 진법을 수련하지 않으셨으니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따위의 말만 했다.
그래서 비록 잘 먹고 잘 자고 맞을 일도 없었지만, 시무단은 어쩔 수 없이 구록산(九鹿山)에서의 나날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많은 크고 작은 사형 사제들이 있었고, 창운곡(苍云谷)에는 많은 작은 요괴들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백리가 있었다.
그는 백리와 노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첫째, 백리는 그가 본 것 중 가장 예쁜 ‘작은 아가씨’였고, 이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은 이제 막 ‘남녀 구별’이 뭔지 어렴풋이 아는 시기라, 겉으로는 여자를 끼고 노는 걸 꺼리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제일 예쁜 여자아이가 자기를 봐주길 바라는 모순된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구록산에는 시무단 또래의 아이가 많지 않았고, 그는 도조의 막내 제자라 외부에서 수련하는 제자들과도 거의 접촉하지 않았기에, ‘남자가 여자아이랑만 어울리는 건 창피한 일’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오히려 작은 미인 앞에서 온갖 재주를 부려 관심을 끌기 바빴다.
둘째로, 백리는 성격이 좋아서, 시무단이 장난을 치면 바로 웃어주었고, 뭘 줘도 예쁘다며 좋아해주었으며, 쿤루(苦若) 대사의 여제자들처럼 아무 이유 없이 심술을 부리거나, 모여서 쨍쨍거리며 시끄럽게 떠드는 일도 없었다.
어느 날, 시무단은 지하 석실에서 기어나와 기지개를 켰고, 정원에서 벼를 쪼아 먹고 있는 취평조를 보고는 슬그머니 다가가 발끝으로 쿡쿡 찼다. 그러자 큰 새는 그에게 한 방 제대로 날렸다——요즘 이 새는 온몸에 새 깃털이 제법 자랐지만, 유독 엉덩이만은 아직 대머리 상태라 어정쩡한 모양새가 되었고, 강화가 기른 토끼 요괴 무리에게 이미 한바탕 비웃음을 당해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그래서 이 모든 원흉인 시무단에게 유난히 적대적이었다.
시무단은 마치 원숭이처럼 정원에 놓인 돌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다시 뾰족해진 턱을 손바닥에 괴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취평조에게 말했다.
“멍청한 새야, 나는 리자랑 사부님이 보고 싶단 말이야.”
취평조는 바빴지만 슬쩍 그를 한 번 흘겨보았고, 다시 정신없이 벼를 쪼기 시작했다. 유능한 깃털 달린 동물로서, 문 앞에 앉아 아내를 찾아 울부짖는 어린 소년 의 우울하고 조숙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무단은 한동안 한숨만 쉬고 있었지만, 본래 성격이 햇볕 한 줌이면 활짝 피는 타입이라, 금세 방금 쌓아둔 감정을 다 쏟아내고는, 다시 취평조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나 자기 방으로 달려가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깡충깡충 뛰어나오더니, 취평조의 등에 한 손으로 퍽 하고 손바닥을 얹으며, 자칫하면 뒤집힐 뻔하게 때리고는 말했다.
“가자! 선배님한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취평조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날카로운 발톱으로 시무단의 손을 긁고, 뻣뻣한 등을 그의 쪽으로 향한 채 돌아앉았다.
시무단이 강화에게 찾아갔을 때, 평소엔 그의 어떤 요구도 잘 들어주던 강화산인은 이번만큼은 유독 고집을 부렸다. 그가 아무리 장난을 치거나 매달리거나 온갖 이유를 다 들어도, 강화는 그저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무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 못 나가게 한다고? 내가 몰래 빠져나가면 그만이지!”
그래서 그날 밤, 그는 취평조의 부리를 끈으로 묶어 소리를 못 내게 하고, 펄떡거리는 날개를 꾹 눌러 한 손으로 제어하며, 몰래 빠져나왔다.
문 앞의 주원진은 그가 강화산인을 따라 한 번 지나간 적이 있었고, 게다가 이 며칠 간 지하 석실에서 진법 관련 입문서적을 거의 다 읽은 자부심도 있었기에, 이런 고급도 아닌 진법쯤은 우습게 본 것이다.
그러나 정원 입구에 도착한 순간, 시무단은 그대로 멍해졌다.
전원 앞에 펼쳐진 진법은 어느새 누군가에 의해 바뀌어 있었고, 돌과 대나무 숲이 서로 얽히며, 마치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단 몇 번만 바라보아도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숲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조차 복잡한 굴곡을 지닌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이 단순한 진법이 아니라 어떤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환경(幻境)이라는 착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시무단이 한 발 내딛었다가 멈춰 섰다.
언제 바닥에 놓였는지도 모를 취평조가 그 대나무 숲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흔들며 마치 술에 취한 듯한 몸짓으로 ‘8’자를 그리며 두 바퀴 돌더니, 목을 앞으로 뻗고 ‘푹’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시무단은 자기가 한 그 호언장담을 떠올리고, 품에서 불쏘시개를 꺼내 불태우기로 했다.
하지만 불꽃이 풀 위에 떨어지자, 불이 붙기는커녕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땅 위에는 희미하게 청색의 주문이 떠올랐고, 물결처럼 반짝이더니 바로 사라졌다.
이는 강화가 그가 불 지를 것을 대비해 산 전체에 내려둔 ‘방화주(防火咒)’였다.
다음 날 아침, 강화가 방에서 나왔을 때, 시무단은 보따리를 베개 삼아 웅크린 채 정원 한복판에서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작은 나무막대기를 쥐고, 땅바닥에는 진법 해석을 시도한 흔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안타깝게도 전혀 풀리지 않았다.
취평조는 아마도 머리는 작고 배만 커서 이런 머리 쓰는 일에는 약한 듯, 여전히 네 다리 쭉 뻗고 기절한 채였다.
강화산인은 손을 등 뒤에 모은 채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 녀석, 배운 지 겨우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문턱에도 못 들어선 수준으로 진법을 풀려고 하다니…… 하지만 겉모양은 제법 그럴싸하군.’
결국 시무단은 강화산인의 그 신통력을 지닌 ‘육회진(六回阵)’이라는 진법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진법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는 당분간 이 산허리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초급 진법이나 고정된 구조를 따르는 죽은 진법과는 달리, 이 ‘육회진’은 살아 있는 진법이었다.
강화는 말했다. “이 진법은 시시각각 성좌의 운행에 따라 변화하며, 남천 성좌의 궤적 전체를 계산해야만 해법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별이 움직이는 한, 진도 함께 변하고, 성좌의 길이 한 치라도 움직이면, 육회진은 곧 천지가 뒤바뀔 수 있다.”
소년이 두 눈을 굴리며 뭔가 나쁜 수를 궁리하는 게 분명한 표정을 짓자, 강화는 손에 든 부채 뼈대로 그의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 “쓸데없는 잔꾀는 부릴 생각 마라. 네가 이 진을 풀지 못하는 한, 이곳에서 나와 함께 수련하는 수밖에 없다.”
시무단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선배님, 저를 이렇게 가둬두시면 제 아내 혼자 집에 있을 텐데, 개가라도 하면 어쩌죠?”
강화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고, 시무단은 정색하며 흥정을 시도했다. “돌아가지 말라 하셔도 좋아요. 그 대신 아내에게 편지 한 통은 써야겠어요.”
강화산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
시무단은 헐떡거리며 종이와 붓을 꺼내더니, 책상에 엎드려 정성껏 흘려쓰듯 백리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말들로 가득한 그 편지는 종이 세 장이 넘도록 두껍게 채워졌고, 다 쓰고 나서 조심스레 말려 봉투에 넣어 봉한 뒤, 취평조의 다리에 묶었다.
그런 다음 보물 보따리를 펼쳐 조심스럽게 성반을 꺼내어 쏟아붓기 시작했다. 팔찌, 귀걸이, 머리장식, 방울, 옥패, 향주머니 끈 등등 온갖 장신구가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시무단이 말했다. “이것들도 리자에게 갖다줘. 전부 내가 사준 거야.”
취평조는 그 반짝이는 장신구에 겁먹은 듯 탁자에서 떨어졌다. 시무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들을 한데 묶어 작은 보따리를 만들어, 그제야 바짝 야윈 취평조의 다리에 묶어주었다.
“날아라.” 시무단이 말했다.
취평조는 그 덩치만 한 보따리를 질질 끌며 불쌍하게 앞으로 한 발 내딛었고, 항의하듯 두어 번 울었다. 시무단은 붓 끝으로 새의 대머리 엉덩이를 콕콕 찌르며 재촉했다.
“아이, 그 많은 걸 먹고도 뭐가 그리 살만 찐 거야? 어서 날아!”
취평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번 날갯짓을 하더니 갓 돋아난 깃털 몇 개를 떨어뜨리고는 겨우 두 자 높이로 날아올랐지만, 이내 추락해 버렸다. 까만 콩 같은 눈을 깜빡이며, 안쓰럽게 시선으로 시무단을 원망했다.
시무단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갑자기 “헤헤” 웃었다. 취평조는 덜컥 몸을 떨었다. 그가 또 뭔가 어처구니없는 꿍꿍이를 꾸미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시무단이 한 마디 주문을 외우고는 취평조 몸에 후 불자, 취평조의 깃털이 죄다 곤두섰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도망칠 틈도 없이 그만 엉덩이가 뜨끈뜨끈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엉덩이 뒤에서 귀신불처럼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날개로 마구 쳐봤지만, 쳐낼수록 불길은 커졌고, 결국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라 혼신의 힘을 다해 밖으로 도망쳤다.
시무단은 제자리에 서서, 연기를 자욱하게 뒤에 남긴 채 멀어지는 취평조를 올려다보며, 자신은 아직 산중턱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꽤 부러움을 느꼈다.
그 시각, 창운곡 안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요왕 백자의가 서 있는 골짜기 안의 ‘업경’이 아무 이유 없이 금이 가더니, 매끄럽던 거울 표면까지 어두워졌다. 작은 요괴들이 인간형으로 변신하면 반드시 이 업경 앞에 가서 백자의에게 허락을 받는다는 거울인데, 지금은 마치 수명이 다한 것처럼 보였다.
전설에 따르면, 창운곡의 ‘업경’은 천지 혼돈이 열리고 천여우 일족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함께 생겨난 보물이며, 신뢰가 내리쳐도 끄떡없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이유도 없이 갈라졌다니, 길조일 리 없었다.
백자의는 매일 장로 몇 명을 대동하고 업경 곁을 돌며 수호했지만, 거울 표면이 층층이 흐려져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일에 대해 백리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백리를 볼 때마다 오히려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 백리는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고, 그의 뺨에는 여전히 핏기가 돌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원래는 시무단과 비슷한 크기의 소년이었는데, 며칠 사이에 마치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 정도로 성장한 듯, 키도 훌쩍 자라 있었다.
백자의는 허겁지겁 밖에서 돌아왔고, 백리가 동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약간 머뭇거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
백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자의는 그의 시선을 불편하게 느끼며 얼굴의 미소가 굳어졌고, 그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엄마가 오늘 좀 피곤해서, 안에 들어가 옷 좀 갈아입을게. 넌 혼자 놀고 있어.”
그러나 백리는 고개를 숙인 채 차갑게 웃으며, 여전히 그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엄마?”
백자의의 걸음이 멈췄다. 백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느릿하게 이어 말했다.
“엄마, 당신 정말 제 엄마 맞나요?”
백자의는 미간이 살짝 떨렸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얘가 무슨 소리야, 내가 네 엄마 아니면 누군데?”
백리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희고 가느다란 손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내가 기억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어릴 적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했을 때 여우 귀가 생긴 걸 제외하곤, 내 본래 모습이 어떤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나요?”
백자의는 급히 말했다.
“그건 네 아버지가 우리 족속이 아니어서 그래……”
하지만 백리는 그녀의 말을 또 끊었다. 눈을 곧장 들어, 번개 같은 시선으로 그녀의 말을 막아버리며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세상에 자기 자식을 무서워하는 친엄마가 어디 있나요?”
백자의는 말문이 막혔고, 눈동자가 갑자기 커지더니, 발이 땅에 박힌 듯 그대로 굳었다. 잠시 후, 이마 가장자리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취평조가 불붙은 폭죽처럼 요란하게 화련동으로 돌진해 들어와 두 사람 사이의 긴장된 분위기를 산산이 깨뜨렸다. 순간, 백리의 몸에서는 살짝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것이 취평조라는 걸 확인하자 살짝 멈칫하며 표정이 누그러졌다.
백자의는 얼른 틈을 타 대충 말 한마디 남기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리는 손끝으로 취평조 엉덩이에 붙은 작은 불덩이를 꺼버리고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가가 쫓아가진 않고, 대신 얼굴에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