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천기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우는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무단이 성반(星盤)을 손에 쥐자, 아이는 금세 얌전해졌다.
어릴 때부터 시무단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뒤집기를 배우자마자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고, 기어 다니는 법을 익히자 방 안의 물건들이 무사할 날이 없었다. 뛰기 시작하면서는 아예 두 발 달린 작은 재앙이 되었다. 그를 얌전히 만들려면 누군가가 항상 곁에서 감시하며, 장난기 가득한 기미를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조는 우연히 그가 성반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단이 아무리 들떠서 뛰어놀고 있더라도, 성반만 하나 손에 쥐어주면 곧 얌전히 앉아 반나절이고 만지작거렸다. 그게 아무 별이나 별선조차 없는 돌판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동굴 안에는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 소년이 나뭇가지로 진흙 바닥을 긁는 소리만이 있었다.
시무단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온몸이 젖은 채로 머리카락에서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몇 가닥은 이마와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려 둥글둥글한 얼굴 옆에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의 흙먼지도 다 닦이지 않아, 마치 회색 털로 뒤덮인 고양이 같았다. 그런데도 표정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이답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은은히 빛나는 성선(星線)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얽히며, 복잡하게 교차했다. 손바닥만 한 성반 위에는 수많은 모래알만 한 별들이 흩어져 천천히 회전했다. 손으로 휘저으면 흩어질 듯했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그 배후에서 언제나 밀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그 흐름을 멈출 수 없는, 억겁의 별운(星運)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왜인지 백리는 그 순간 시무단이 자신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꼈다.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간극. 결국 그는 입을 열고 말았다.
“그만해. 너무 번거로워. 우리 여우족 중에서, 수련 좀 한 애들이라면 천겁 하나쯤은 다 겪는 거야. 견디면 되는 거야.”
시무단은 “응” 하고 대답했지만, 손에 쥔 나뭇가지는 멈추지 않았다.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리는 계산식은 외부인이 보기엔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막 입문한 아이들이 연습용으로 쓰는 ‘삼련식(三聯式)’일 뿐이었다. 시무단은 백리가 자기 또래일 거라 여겨, 인생 몇 해 살아보지도 않았을 테니 별 복잡한 전생이 있겠냐 싶어, 이 계산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내 그는 찡그리며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얼굴의 흙먼지가 말라 가렵자, 나뭇가지로 긁으며 중얼거렸다.
“왜 안 나오지? 이상하네.”
백리는 다시 말했다.
“그만하라니까.”
그가 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텐데. 시무단은 아이 특유의 고집이 발동했다. 평소엔 성반을 산 아래로 들고 나가는 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번에 어렵사리 손에 넣은 만큼, 무언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백리를 안심시키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삼련식은 초보자용이라, 명성(命星)을 봐도 대강의 윤곽밖에 안 나와. 자주 틀리기도 하고. 이번엔 다른 걸 써볼게.”
백리는 입을 열려다 말았지만, 시무단은 벌써 나뭇가지로 지운 다음 훨씬 복잡한 계산식을 빠르게 그려내기 시작했다. 성반의 성선이 갑자기 늘어나더니, 조용히 손가락을 감싸던 실들이 한꺼번에 뭉쳐 소년의 손목까지 뒤덮어버렸다.
성반의 별빛이 기이하게 빛나며 장작불조차 눌렀다. 백리는 성반 안을 들여다보다가, 자신의 수련으로도 그 혼란스러운 별의 움직임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고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시무단은 아직 어렸다. 계산식을 반쯤 그린 시점에서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성선의 무게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성선은 점차 더 밝게 빛났고, 그의 얼굴은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백리는 깜짝 놀라, 그가 뭔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아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손이 닿는 순간, 강한 힘이 백리를 튕겨냈고, 손끝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손가락은 금세 부어올랐다.
그는 외쳤다.
“무단!”
하지만 시무단은 들리지 않는 듯, 땅 위에 계속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마치 의식이 성해(星海)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성산(星算)이라는 학문은 속세의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게 들리지만, 도수(道修)자들에게는 그리 드문 것이 아니다. 구륵산(九鹿山) 같은 명문정통은 물론이고, 이름 없는 문파조차 이 기술을 가르치긴 한다.
다만 대부분의 수련자들은 무공이나 도법에 치중하니, 문자 배우듯 간단한 기초만 배우고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삼련식을 간신히 이해하거나, 잘해봐야 '소투석(小投石)' 같은 간단한 길찾기나 인물 탐색 정도에 쓸 뿐이다.
이번에 기회를 얻은 시무단은 백리 앞에서 뭔가 뽐내고 싶었다. 방금 삼련식조차 연결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가장 자신 있는 '구성층체식(九星層遞式)'을 꺼내 들었다.
이 복잡한 계산법은 천기(天機)를 엿볼 수 있는 고등 비법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라 불렸지만, 도조가 남긴 “이 수식은 매우 위험하니, 천기를 직접 들여다보지 말라”는 경고도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백리는 성산을 몰랐지만,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천둥소리가 들려오자 그 위험성을 직감했다. 옆의 취병조(翠屏鳥)도 날개를 퍼덕이며 시무단에게 바람을 일으키고 비명을 질렀다.
시무단은 그런 외부 세계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복잡한 명운을 계산하다가, 백리에게서 두 개의 명성이 얽힌 이상한 궤도를 발견했다. 수식은 점점 그를 끌어들였고, 성선은 손 전체를 감쌌다.
마침내 번개가 문 앞에서 폭발하듯 내려쳤고, 백리는 참지 못하고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금속빛을 뿜었다. 그가 휘두른 손은 성선을 단숨에 끊어냈고, 시무단을 안고 옆으로 굴렀다.
곧이어 천둥이 시무단이 앉아 있던 성반에 직격했고, 성선은 빛을 폭발시키며 다시 성반 안으로 흡수되었다.
시무단은 그제야 자신이 사고를 쳤음을 깨달았다. 그는 멍하니 백리의 품에 안겨 있었고, 눈앞이 다시 보일 즈음엔 바위 동굴의 바닥이 갈라져 있었다.
성선은 생기를 잃고 땅에 떨어졌고, 계산식은 비바람에 대부분 지워졌다. 취병조는 그의 어깨에 날아와 이마를 쪼았다. 그는 이마를 감싸고 백리의 등을 토닥이며 “무서워하지 마”라고 중얼거렸지만, 정작 자신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백리는 그의 손을 젖히고 무릎을 꿇어 북쪽 하늘을 향해 절했다.
“어린 마음에 천기를 건드렸습니다. 별군께서 노여움 푸소서.”
그리고는 시무단의 머리를 억지로 눌렀다. 시무단은 “아야!” 하고 외치며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천신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천둥 치지 마세요, 제 마누라가 놀랐잖아요……”
그러자 백리는 그의 머리를 다시 눌러, 장난기 가득한 말은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천둥이 약해지고 하늘도 점차 맑아졌다. 백리는 시무단을 풀어주며 노려보았다. 시무단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아첨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분노도 절반쯤은 사라졌다.
시무단은 그의 얼굴빛을 살피며 옷자락을 붙들었다.
“소리내지 마, 나 진짜 잘못했어…… 나 무시하면 안 돼……”
백리는 냉랭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돌렸다.
시무단은 머리를 긁적이며 애늙은이처럼 말했다.
“사부님이 가르쳐줄 때도 뒤뜰에 있는 새랑 짐승들 상대로 해봤는데, 이렇게 큰 반응은 없었단 말이야. 리자, 너는 명성이 두 개나 있잖아? 이미 희귀한 일이고 그 중 하나가 천문으로 뚫려 있던데. 계산이 거기서 막혔어. 겨우 실마리 잡았는데 천둥이 치고… 분명히 나한테 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야…”
백리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사이에 시무단의 미간이 약간 찡그려졌고 한 손가락으로 자기의 턱끝을 괴고있었다. 장난꾸러기의 얼굴에는 말할수 없는 정중함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민을 털어내고는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내가 널 지켜줄게.”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고개를 돌려 큰 재채기를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콧물을 닦고 작은 얼굴을 힘껏 받쳐"콧물을 닦으면 또 사내대장부"라는 모양을 하고 턱을 약간 들어 자신을 좀 커 보이게 하려고 했다.
백리는 한숨만 내쉬면서 마음속에서 마지막 불기마저 떨어져버린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 바보 같은 녀석이 언제 어른이 될까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시무단의 그 작은 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날씨가 마침내 맑아지자, 시무단은 그제야 그의 작은 작은 보따리를 메고 팔 아래로는 발버둥치는 취병조를 계속 껴안고, 그를 창운곡 출구까지 데려다준 백리와 작별을 고하며, 취병조는 목이 쉬도록 발버둥치는 가운데 깡충깡충 뛰며 멀어졌다.
백리는 산골짜기 가장자리에 기대어, 시무단의 그 엉뚱한 발걸음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사람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 그는 본래의 소년 모습으로 돌아와 손바닥 위의 반짝이는 금빛 두구선(豆蔻線)을 바라보며, 조용히 돌아섰다.